[Book] 정희진처럼 책읽기
독서는 내 몸 전체가 책을 통과하는 것이다.
몸이 슬픔에 잠긴다 기쁨에 넘친다 넋을 잃는다 ..... 텍스트를 통과하기 전의 내가 있고 통과후의 내가 있다.
책을 무조건 많이 읽기보다 생각하기를 권한다. 한권의 책을 여러 권으로 읽는 훈련이 필요하다
'태어나서 죄송합니다'는 자학이 아니다. 인간은 낳아지는 것이지 누구도 태어나지 않는다. 문법과 무관하게 탄생은 능동태일 수 없다 자기 생명을 스스로 생산하는 사람이 있나? 우리는 동의없이 태어났다. 살기 싫은 사람에게 이민큼 열 받는 일도 없다. 의지로 가능한 것은 자살 뿐이다.
아무 인사없이 -파이 이야기
사람들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대개 자기 자신, 가족, 연인... 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여기'에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내게 무슨 문제가 생기면 연락해줄 사람은 거리에서 처음 만난 이라도 지금 접촉하고 있는 사람이다. 아무리 사랑해도 '여기 없는 이'는 소용이 없다. 그런데 심지어 나는 돌아가신 엄마, 죽은 사람이 가장 소중하다고 답한 것이다.
인간이 옆에 있는 사람을 '함부로 하는' 이유는 시간(미래나 과거)을 매개로 한 권력욕 때문이다. 오지않을 미래의 권력을 위해 현재 소중한 사람을 버리는 영화 속 광해군이나 존재하지 않는 엄마와 과거에 살고 있는 나나, 어리석기가 한량이 없다. '지금 여기'를 살면 소유 관념에 휘둘리지 않고 삶 자체를 누릴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진보 개념은 근대화 시각에서 발전주의(progress)를 의미한다. 민주주의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는 적대하거나 논쟁하는 세력이 아니다. 정상적인 국가 건설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추구하되 방법이 다를 뿐이다. 공통점은 성 차별과 주류 지향이고 차이는 '종복'이라는 기이한 용어에서 보듯 제대로 된 국가를 만드는 일에 통일을 포함하는 여부와 그 방식일 것이다.
평화에 대한 욕망은 반평화적이다. 평화를 둘러싼 경합이 평화다. '모든 이가 사이좋은 상태'는 존재할 수 없다. 이 불가능한 상태를 약자가 인내함으로써 가능한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 평화다. 강자의 양보로 평화가 실현된 경우는 없다. 양보했더라고 그것은 정의이지, 관용이나 배려가 아니다.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내 몸이 나다. 타인을 판단할 필요가 있다면 그냥 그의 행동을 보면 된다. 행동이 그 자신이다. 이 말은 인간으 행불행은 개인의 결과""내 탓이다")라거나 부와 권력의 소유가 허무하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인간은 타인과 사물은 물론 자신도 소유할수 없다. 가장 간단한 증거는 누구나 병들고 죽는다는 사실이다.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인간은 행동일 뿐 대상도 주체도 아니다. 그렇다면 버림받았다고, 모욕당했다고, 빼앗겼다고 분노할 이유는 줄어든다.
"참나;는 내 행동뿐이다. 인간사에서 죽음과 더불어 유일한 진실이 있다면 이것이다. 유일한 진실이자 유일한 정의인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독후감의 의미는 단어 그 자체에 있다. 독후감 말 그대로 읽은 후의 느낌과 생각과 감상이다. 책을 읽기 전후 변화한 나에 대해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없다면 독후감도 없다. 독서는 몸이 책을 통과하는 것이다. ... ...
독후감은 그 변화 전후에 대한 자기 서사이다. 변화의 요인, 변화의 의미, 변화의 결과.. 그러니 독후의 감이다. 당연히, 내용요약으로 지면을 메울 필요가 없다. 독후에 박 변화가 없다면? 나는 왜 책을 읽고 아무 느낌이 없을까도 좋은 질문이다. ... 영화든 드라마든 미술 작품이든 책이든 모든 텍스트는 철저히 읽는 이의 상황에 의존한다. "저자는 주겅ㅆ다" "책은 독자가 다시 쓴다."라는 말은 권력이 결국 읽는 이, 듣는 자에게 있다는 뜻이다. 언제나 문제는 나 자신이다. 몰론 나는 사회와 대립하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적 몸이다.
어느 출판사의 사훈은 책때문에 망가지는 나무가 없도록 하자는 것이라고 한다. 좋은 독자를 지구를 구한다.